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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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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쥐 전쟁(Rattenkrieg) === ||<tablealign=center><tablewidth=600><tablebordercolor=#FFFFFF,#1f2023><nopad> [[파일:attachment/stalingard1.jpg|width=100%]] || >"한 번은 독일군과 20m 앞까지 대치한 적도 있었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죠. 여기에는 제가 있고 저기에는 독일군이 있고... 먼저 [[수류탄]]을 던지는 쪽이 이기는 거였죠.[* 안토니 비버의 저서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에 의하면 레이어 케이크마냥 건물 한 층은 소련군, 위층은 독일군, 또 그 위층에는 소련군, 또또 그 위층은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 >-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의 잊혀진 증거 - 스탈린그라드 전투' 편 독일군은 시내 점령이 비교적 간단하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막상 시가전에 들어가자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병, 공병, 기갑, 공군의 완벽한 제병협동이 독일군의 장기였지만 폐허가 된 시내의 잔해로 인해 전차 기동이 어려웠고, 당시에는 헬기나 드론도 없었기에 부서진 건물과 잔해에 숨어있다가 공격해오는,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보병 위주의 [[시가전]]에선 맥을 못추렸다. 어디로 진격하던 폐허 속에서 튀어나와 집요하게 공격하는 소련군을 일일이 제압하다 보니 단기간에 사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이런 시가전을 농담 삼아 '생쥐 전쟁(Rattenkrieg)'이라고 불렀다. 결국 스탈린그라드를 맡고 있던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무리해서 단기간에 중심지를 점령하는 것보다 천천히 오랜 시간과 병력의 소모를 감수하더라도 건물 하나하나 소련군이 없는 것을 전제로 다 때려잡아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결국 양측이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병기들을 군인들에게 쥐어주고, 전장의 모든 것이 동원된 지독한 [[소모전]]으로 흘러갔다.[* 콜 오브 듀티나 서방에서 만든 영화 등에서는 소련군이 인력을 끌어모은 뒤 한 명에게 모신나강 소총을, 한 명에게는 5발짜리 탄약 클립 2개를 쥐어주고 총을 가진 자가 죽으면 탄약 클립은 쥔 사람이 이를 들어 싸우라며 전장에 투입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소련군의 피해는 극심해 방어전의 중핵이었던 62군이 단기간에 많은 병력을 잃고 다시 보충되는 상황이 반복되어 정원보다 사상자가 더 많은 끔찍한 상황에 달할 정도였다. 훈련도 채 완벽히 받지 못한 소련군 병사들은 스탈린그라드 전선에 속속 도착하여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볼가강과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아무리 막강한 동원력을 자랑하는 소련이라도 이런 인명 피해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어서, 62군은 갈가리 찢겨나간 사단의 잔해들로 이루어진 상태가 되었다. 추이코프는 이런 부대들을 긁어모아 전투를 수행했으며, 강 건너편에서 예료멘코는 사상자를 보충하기 위해 [[취사병]]까지 전방으로 내보냈다. 후방에서는 소련군의 포격 지원이 가세했다. 독일군이 특히 싫어한 것은 [[카츄샤 다연장로켓]]으로, 12,000평 정도의 면적에 4톤 정도의 폭약을 쏟아낼 수 있었다.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은 이런 소련군의 포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로딤체프 장군 부하들.webp|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마마이 언덕 전투에서 맹활약한 소련 육군 제13근위사단장 [[알렉산드르 로딤체프|{{{#fff 알렉산드르 로딤체프}}}]] 장군[* 가운데 철모를 쓰지 않은 사람. 당시 [[소장(계급)|소장]]]과 부하 장병들[* 이 사단은 [[시베리아]]에서 달려왔으며 그래서 아시아계로 보이는 병사도 보인다.] || 위 사진 속의 로딤체프 장군도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 지 2시간 만에 참모 두 명은 독일군 총에 맞아 전사하고 자신도 죽을 위기를 넘겼다. 한 번은 한 변이 수백 미터 밖에 안 되는 삼각형 진지 안에 볼가강을 등진 채 자신의 사단과 함께 완전히 포위되었고, 교전 중에 불이 붙은 휘발유가 사단 지휘소까지 흘러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는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스탈린그라드 중앙역 벽에 '로딤체프의 친위부대원들이 여기서 조국을 위해 싸웠고 잠들다.'라고 휘갈겨썼다.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볼가강 교두보를 유지하기 위해 소련군은 군대에 처음 들어온 신병부터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을 겪어본 노병과 [[취사병]] 같은 지원 병과까지 여유가 있는 인력이라면 닥치는 대로 긁어 모아 동원했으며, 정예 병력 또한 상당수 투입했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동원된 사단들과 흑해 함대에서 급조된 해군 보병대[* 정식 편제도 아니고 [[세바스토폴 공방전]] 등 [[크림 반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수병들과 극동의 태평양 함대 수병들을 동원해 [[세일러복]] 차림 그대로 혹은 육전복만 지급해 준 식이었다. 이렇게 동원된 태평양 함대 수병들 중에는 전투에서 유명한 저격수가 되는 [[바실리 자이체프]]도 있었다. 단, 자이체프는 육상 행정병 근무 중 차출되기 전 먼저 전출을 지원했다.]나 앞서 언급된 제13근위사단은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독일군 폭격기가 도시를 폐허로 만든 덕에 [[저격수]]들에게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어, 독소 양군의 저격수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가장 유명한 저격수는 소련군 제1122 보병연대의 이반 시도렌코인데,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500명을 사살하였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external/www.war44.com/grain_elevator_stalingrad.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포격을 가하는 독일 포병대 ||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마이 언덕[* 몽골인들의 요새가 위치했던 스탈린그라드의 고지대. 이곳을 차지하는 쪽이 스탈린그라드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수도 없이 바뀌었으며, 어떤 때는 소련군이 하루에 1개 사단을 잃기도 했다. 강 아래쪽의 곡물 창고에서는 전투가 너무 근접전으로 벌어져 소련군과 독일군이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거대한 사일로로 만들어진 곡물 창고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지어진 요새 수준의 구조를 자랑했다. 높기도 높아서 하나의 성이나 다름없었는데, 독일군은 이 건물을 점령하기 위해서 전차, 포격, 폭격까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소련군의 저항은 무너지지 않았다. 전투는 몇 주간 계속되었는데 독일군 장교가 항복 권유를 위해 곡물 창고를 찾아왔지만 퇴짜를 맞았고, 곡물 창고의 소련군 부대가 정찰기와 전차까지 동원된 10번의 공격을 격퇴하는 등 독일군의 전진을 저지했다. 이들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물도 부족하여 항시 갈증에 시달렸지만, 싸움을 지속하다가 종국에는 보급품 부족으로 탈출하게 된다. 독일군이 최후로 곡물 창고의 적을 소탕했을 때 그들은 겨우 40구의 소련군 시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저항의 규모로 볼 때 더 많은 소련군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width=48.25%><nopad> [[파일:external/www.war44.com/pavlov_house.jpg|width=100%]] ||<width=24.25%><nopad> [[파일:external/b05634fda426c0ab63a38683d5fe1d7b0878e47794f900dd9d14389d0bb3d8bd.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파블로프의 집(Дом Павлова) || 벽돌기둥만 남아있는 현재 모습 || 도시 내 다른 곳에서는 [[야코프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소련군 부대가 한 아파트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이 아파트는 시의 중앙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본래는 독일군이 보병대를 이끌고 이 건물을 공격해오자 파블로프가 부상당한 선임병을 대신하여 지휘해 고작 13명을 이 건물에 배치하여 독일군을 막았던 것으로 시작했다. 이들은 13명의 소수의 인원임에도 맹렬하게 싸웠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투 때문에 수면부족에 시달렸고, 가끔씩 독일군의 3호 전차가 공격해오면 지붕에서부터 지하실까지 활용하여 집중사격을 가하여 쫒아냈다. 건물 자체는 적들에게 포위되었지만 얼어붙은 강이 확보되어 있어 이를 통해 보급품이 넘어왔기 때문에 보급 문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병사들은 이런 투지로 버텨갔고, 결국 이후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기관총, 대전차 소총 및 박격포 등으로 이 건물 전체를 무장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아파트를 지뢰밭으로 둘러싸고 창문에 기관총을 배치하였으며, 지하실의 벽에 틈을 내어 통신을 용이하게 했다. 이 아파트는 나중에 '파블로프의 집(Дом Павлова)'이라고 불린다. 파블로프의 집은 무려 58일[* 무려 '''[[프랑스]]'''보다 오랫동안 독일군을 막아냈다.] 동안이나 방어에 성공하며 11월 25일에 독일군을 후퇴시킴으로써 이 방어전의 승리자가 된다. 파블로프의 집은 나중에 소련의 선전용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독일군은 파리 함락보다 이 건물 하나 앞에서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attachment/Red_October_factory.jpg|width=100%]] || 한편 붉은 10월 제철소, 기차역[* 하루에 주인이 12번 바뀐 적도 있다.] 등을 비롯한 공장 지대에선 처절한 사투가 연일 계속됐고 수 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이곳에서 사라질 정도로 양군의 전투는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공장 단지를 사수하란 명령을 받고 들어간 소련군 제187 보병사단은 불과 3일 만에 사단 병력의 90%가 부상당하거나 전사했다.[* 이 공로로 187 보병사단은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다. 출처: 독소전쟁사] 특히 로딤체프 장군의 13근위소총사단을 비롯한 소련군의 저항은 매우 완강했고 독일군의 피해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격전지로는 소연방 영웅 광장 옆에 있는 백화점이 있었다. 백화점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백화점이었고, 소련군 병사들은 지하실에서 저항하다 전멸했다. 이곳은 파울루스의 지휘소가 된다. 격전이 이어지며 독일군은 비록 엄청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전투경험이 있고 무기도 충실한 육군과 공군으로 장악한 제공권 덕에 압도적인 화력에 힘입어 '''10월에는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90% 이상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소련 62군은 10월 말엔 양단되어 볼가강 서쪽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독일군 전투기들이 병력수송함을 공격해서 피해를 입더라도 계속해서 볼가강을 통해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며 교두보를 사수하였다. 1942년 11월, 독일군은 교두보를 끝장내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를 확정짓기 위해 총공세를 시작했다. 이 순간이 소련군 최악의 위기였지만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 끝에 62군은 결국 교두보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종래의 수많은 접전처럼 엄청난 수의 양군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이 처절한 사투가 계속되는 동안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길고 긴 전투를 끝장내고 남부 러시아에 진출한 독일 2개 집단군을 섬멸하기 위한 반격 작전인 천왕성 작전을 입안했고,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게 되는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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